동양의 무無 사상의 정수 「천부경」과 하이데거
양섭용 대한사랑 기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 1976)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입문』에서 첫머리에 “왜 존재자는 존재하고 도대체 무가 아닌가?”라고 하여, 형이상학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존재의 근원 무無에 대한 연구로 현대철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천부경」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가장 근본 주제인 무無에 대한 경전이다. 1920년 북경에서 출간된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이 세계 여러 대학 도서관에 보급되었는데, 하이데거가 「천부경」을 입수한 경로는 이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추후 입수경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에서 ‘공공철학’으로 전 세계를 무대로 철학담론을 해온 김태창 박사는 카이스트에서 제정한 2회 미래세대상을 수상한 특별강연회에서 하이데거와 「천부경」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초대교수였던 박종홍 박사가 세계적인 대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초청을 받고 자택을 방문하게 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서 초청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하이데거가 그를 집에 직접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하이데거가 하는 말이, “일본학자들과 대화를 해서 일본철학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철학자들과의 얘기를 통해서 중국인의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인의 독자적인 철학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의 철학이야말로 근원철학(radical philosophy)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문헌이 ‘「천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면서, 직접 ‘「천부경」’을 보여주더니 “이것을 좀 해석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종홍 씨가 그때까지는 서양철학만 하고 한국철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천부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한국인의 철학을 알게 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말을 어떤 신부님의 회고담에서 읽은 적이 있다”라고 그는 밝혔다.
문성철 한국전통사상연구원장도 김태창 박사가 어느 신부의 글에서 읽었다는 박종홍 교수의 하이데거와의 만남과 「천부경」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독일의 세계적 철학자 하이데거는 196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한 서울대 박종홍 철학교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접대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왜 초청했는지 아느냐? 바로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명해진 이유는 동양의 無사상 때문인데, 동양학을 공부하던 중 아시아의 문명발상지는 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역사상 가장 평화적 정치로 대륙을 통치한 조선이 있었음도 알았다. 나는 동양사상의 종주국인 한국인을 존경한다. 그런데 아직 한배검님의 「천부경」은 이해할 수 없으니 설명해 달라’ 박종홍 교수는 ‘부끄럽지만 당시 「천부경」이나 단군조선이 2,000년 이상 대륙을 통치했다는 역사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답을 하지 못했다.’고 어느 강연장에서 실토했다.”라고 하였다.
박종홍 박사가 하이데거를 만나서 「천부경」을 들었다는 내용이 두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실제 박종홍 박사의 전집에 실린 <일기>, <기행문>을 살펴보면 1957년 7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하이데거 저택을 방문하여 직접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서동익 군과 프라이부크르 행, 책방에서 ‘존재와 시간’ 구입, 작은 꽃다발 준비, 이문호 씨 자가용차로 하이데거 자택 방문, 슈바르츠발트의 산장 행, … 부부 노인에게 문의, 어린아이도 하이데거의 집을 알고 가리키며 저기 중턱 셋째 집이라 한다. 하이데거 인상 기록, 구리빛 얼굴, 작은 키, 날카로운 눈, 두터운 손, 큼직한 코 … 하이데거는 집 모통이에서 내려올 때까지 뒤떨어져 일행을 따르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 1957년 7월 26일 일기
“바로 그 이튿날 그러니까 1956년 7월 27일, 나는 이번 구라파 여행의 주요 목적의 하나라고 할 하이데거 교수를 방문하기 위하여 하이델베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프라이부르크로 향하였다. 마침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 중인 서동익 박사가 동행하게 되어 나로서는 다시없이 유쾌하였고 마음 든든하였다.
우리는 오후에 프라이부르크 역에 내리자 의과대학으로 이문호 박사를 찾았다. 귀중한 연구로 바쁜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나의 하이데거 교수 방문을 위하여 일부러 애써 연락을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교수는 현재 슈바르츠발트의 산장에 가 있음직하나, 언제 방문하더라도 면회하도록 선처하겠다는 하이데거 교수 부인의 언약이 있었다고 한다. 더운 낮보다 저녁때가 오히려 무방할 듯도 하여 우리 일행은 곧 떠나기로 하였다. 현재 이 박사와 같이 의과대학에서 연구 중이며 동숙同宿하고 있는 강신호 씨도 마침 좋은 기회라 동행하기로 하였다. …
우선 하이데거 교수의 거처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의 사택私宅으로 갔다. 약간 언덕진 조용한 주택지, 저편 뒤로 정원이 달린 2층 집이다. 어떤 여인이 문으로 나와 하이데거 교수 부부가 같이 산장에 가 있다고 한다. 바로 예상하였던 바다. 우리의 차는 다시 산장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
하이데거 교수가 거처하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몸집, 햇볕에 타서 검붉은 얼굴, 일견 농사꾼같이 보이는 사람이 만면滿面에 웃음을 띠며 악수 인사를 한다. 이 분이 하이데거 교수다. 두툼하고 검은 손,마치 농부의 손과도 같이 보였으나 그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
아무리 보아도 방금 농장에서 돌아온 농부 같기만 하다. 이 양반이 이런 차림으로 런던이나 파리의 거리를 걸어간다면 그 누가 이분이 40대에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을 지낸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생각이나 할 것인가. …
그가 동양의 노자老子에 관심이 깊어 수종의 도덕경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중국인 유학생으로부터 양피羊皮 뚜껑으로 한 것을 기증받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말을 그 후에 전해 들었다.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 교수도 노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지 오래거니와 내가 그를 스위스 바델의 그의 집 서재로 방문하였을 때 그는 불교의 반야般若의 영지靈智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동양의 유불선 삼교三敎에 관한 자기의 철학적 저술을 집필중에 있음을 말하였다. …
하이데거 교수를 대하여 탐탁히 둘러앉은 우리 일행은 네 사람이나 되는지라 이런 이야기 저런 질문이 연발하는데 주인은 하나하나 숙고熟考하여 가며 조용히 응답한다. 나는 그의 사상에 관하여 기왕부터 품고 있던 몇 가지 질문을 하였고 그의 해답을 특히 친필로 써 주기를 청하였다. … 너무 늦도록 장시간에 걸친 방문이 미안케 생각되어 우리 일행이 가족들과 작별하고 귀로歸路에 오르자 … 우리끼리만 되자, 모두가 똑같이 인상 깊은 감명들을 토로한다. 정말 철학자답다는 둥, 소크라테스가 아마 그 비슷하였을 것이라는 등, 저마다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1957년 7월 26일(금) 기행문
박종홍 박사는 해방과 더불어 정부 수립된 뒤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4년에는 한국철학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1955년에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1년간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구하고는 귀국 길에 유럽 철학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 기회에 많은 세계적 지성을 방문하여 대담하였으며 그것을 발표하였다. 하이데거를 만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그는 만년에 철학과에 입학해서 서양철학, 곧 독일의 관념론 연구에 골몰하였다. 박종홍 박사는 1957년 서양의 여러 지성과 하이데거를 만난 이후 그들의 동양철학 연구에 놀라운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의 철학연구에 큰 방향 전환이 있었음은 저서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서양철학 중심의 연구와 저술을 해왔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 『한국사상사(불교편)』, 『자각과 의욕』(1972), 『한국적 가치관』(1975) 등 한국 사상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남겼다.
하이데거가 「천부경」에 대해 그의 저술에서 언급한 기록은 없으나 저간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천부경」의 무無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