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봉오동 전투, 홍범도와 독립군
기억해야 할 <봉오동 전투>, 홍범도와 독립군
박찬화 대한사랑 기자
올해 삼일운동 백 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과의 역사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아직도 반성의 기색이 없는 일본은 역사 왜곡하기 바쁘다. 이런 즈음 개봉한 <봉오동 전투>는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다. 홍범도 등이 이끄는 700여 명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310여 명의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여 1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0년 12월 25일자 ≪독립신문≫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이 사살되었으나 독립군은 4명 전사, 2명 중상에 그쳤을 뿐이라 한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봉오동 전투>의 원신연 감독은 “기록에 등장하는 분보다는 이름도 남아있지 않은 독립군들이었으면 했다.”라고 했고, 배우 유해진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이름도 없이 숫자로만 기록된 분들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1942년 태장춘 원작의 연극 <의병들>을 초연할 때 생존해 있던 홍범도 장군이 “나를 영웅으로 내세우지 말고,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독립군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만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번에 원 감독이 그 당부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름도 없는 독립군 투사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서 그들은 ‘아무개’라는 의병이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의 모든 이름이 의병이다.”라는 명대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이름 없이 사라진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독립전쟁을 벌여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희생됐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야 추모해야 할 곳은 무명용사의 묘이며 추모비다. 미국 워싱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24시간 경호받는 추모비가 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도 무명용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프랑스 파리 개선문 바닥에는 무명용사를 기리는 동판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른다. 러시아 모스크바 무명용사의 묘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모든 국민들이 접근성이 좋은 곳에서 수백만의 무명용사들을 추모해야 한다.
<봉오동 전투>에서 기억해야 할 최운산 형제들 우리는 ‘항일 영웅’ 김좌진과 홍범도에 가린 독립군을 기억해야 한다. 간도국민회군 안무, 대한독립군 홍범도, 군무도독부 최진동, 신민단 등이 함께한 전투였다. 그중에 최운산 형제들이 있다.
최운산(1885~1945) 장군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의 참모장으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최운산은 봉오동, 도문, 석현, 서대파, 양수천자 일대 토지를 거의 소유하고 제면공장, 제유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여러 공장을 운영하며 거액의 재산을 모았다고 전한다. 그는 이 돈으로 당시 황무지였던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사병을 키웠다.
1915년 두만강 너머 왕청현 봉오동 골짜기에 3,000여 평이 넘는 사설 군사기지가 들어섰다. 연변에서 태어난 최운산은 1910년에 이미 그곳으로 조선인들을 불러 모아 상촌·중촌·하촌 농장을 개척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능통해 중국군 장교가 되어 고위층과 안면도 넓혔다. 동북 지역에 토지개혁이 시행되면서 여러 황무지를 개간하자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연변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올랐다. 축산, 미곡, 무역, 제면, 성냥, 비누공장까지 세운 그는 일제나 마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사병집단을 만들었다. 그들이 후에 독립군으로 변모했다.
그는 1910년 봉오동에 자리를 잡고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부대 이름을 ‘군무도독부’로 지었다. 이 부대는 후에 ‘대한독립군’, ‘국민회의’, ‘국민군’ 등과 함께 ‘대한북로독군부’로 연합한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이 부장, 안무가 부관이 되어 행정과 정치, 재정 등을 주로 담당했다. 홍범도는 그 산하의 정일북로제1군사령부(征日北路第一軍司令部) 부장이 되어 용병을 담당했다. 병력은 4개 중대로 편성했다. 북로군정서 이전에 제대로 편성된 부대였다.
일본군의 만행을 똑바로 알아야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는 삼둔자 전투나 고려령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서 보여준다. 이런 전투에서의 승리가 <봉오동 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양민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청산리 전투에서 더 크게 패배하자 민간인을 대상으로 화풀이를 겸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그런 만행이 경신참변(간도참변, 간도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봉오동,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을 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그 수습을 빌미로 간도에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출병시켰다. 그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보복 학살로 만주에 있는 조선인 3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 안옥윤이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칼로 찔러 죽이고, 작두로 잘라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생매장하여 죽이거나 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약탈, 방화, 구타, 고문, 강간 등 군대가 민간인에게 범할 수 있는 온갖 범죄가 저질러졌다.
<봉오동 전투> 이후 계연수 선생도 살해당했다
<봉오동 전투> 후에 악에 받친 일본군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점인 1920년 8월 15일, 홍범도의 벗이자 『환단고기』의 편저자 계연수는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 감영극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14세 소년 이유립이 있었다. 그는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와서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청산리 대첩에서도 활약한 홍범도
“자 이제 청산리로 가자” 영화 마지막에 홍범도(최민식 분)가 독립군 부대원에게 명령한다. 인상 깊은 장면이다. 우리는 봉오동 전투 하면 홍범도, 청산리 전투 하면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홍범도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해 또다시 승리의 전투를 이끌었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
1908년경 함경도 사람들이 부르던 ‘날으는 홍범도가(歌)’의 일부다. 말 그대로 홍대장이 가는 길에 일본군은 막 쓰러졌다.
6일 간의 청산리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이 전투의 일본군 사상자 숫자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교과서에는 3,300명이 사살되었다고 나오고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는 일본군 약 2,000여 명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기록은 믿을 수 없다. 일본 측 기밀문서에는 사망자 수를 단지 11명으로 기록했다. 삼일운동 시의 사망자도,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의 사망자도 일본 측은 수백 명이고 우리는 수천 명이다. 말도 안 되게 축소, 은폐했다.
김좌진 장군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만주 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장군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1920년 2월에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여 독립군 지휘 간부들을 길러 내었다. 이해 9월에는 처음으로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다. 명실 공히 만주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등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홍범도, 이범석과 함께)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일제강점기 민족적 쾌거였고 독립 전투의 금자탑이었다. 단비를 기대하던 조선 민중으로서는 큰 선물을 받았고 독립에 대한 확신과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 이후 만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계속 증파되었다. 그들의 만행도 가일층 심해졌다. 일본군은 여기저기서 아무 죄도 없는 재만 한인들에게 패전의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한인 부락을 초토화하는 작전도 전개되었다.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을 댄 보천교
김좌진 장군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장군은 보천교와 연결되었다. 장군은 이미 1922년 초에 유정근을 밀사로 특파하여 보천교의 차경석 교주에게 협력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유정근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필요한 군자금 모집은 계속되었고, 김좌진 장군과 보천교의 접촉도 계속 진행되었다.
1924년 11월, 일본 관동청 경무국의 보고 내용을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년(주: 1923~24년) 김좌진은 자금 부족 때문에 부하를 해산하여 전혀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번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景錫)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寧古塔)에 와서 2만여 원의 군자금을 주었다. 이로써 김좌진은 이 돈으로 옛 부하를 소집해 삼차구(三岔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해 동지를 인솔해 동녕현(東寧縣)에 들어가려 했다.
‘김좌진, 군자금을 확보하다’라는 문건의 내용이다. 군자금은 무장투쟁을 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군자금이 없으면 무기를 구입할 수 없고 무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당연히 군사작전도 할 수 없다. 활동불능 상태가 된다.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김좌진 장군에게 보천교에서 5만 원이라는 거금을 준 것이다. 또 다른 자료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 본부(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동녕부에서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 원 정도로 볼 수 있다. 2만 원이면 8억 정도이고 5만 원이라면 20억 정도로 추정된다. 이 액수라면 부하들을 재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이 다시금 항일항쟁을 이끌 수 있도록 한 힘이 보천교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잊힌 역사이다.
홍범도, 오동진 장군의 역사광복 자금으로 발간한 『환단고기』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 홍범도 장군은 어떠한가? 그도 군자금을 받아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 자금의 일부를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을 역사서 발간에 대었다. 『환단고기』 범례의 글을 보자.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 내가 정성을 들여 부지런히 편집하고 옮겨 적었다. 그리고 홍범도, 오동진 두 벗이 자금을 대어 목판에 새겨서 인쇄하였다.(桓檀古記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而且余精勤繕寫 又因洪範圖 吳東振兩友之出金 付諸剞劂)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환단고기』를 발간할 때 그 비용을 홍범도 장군이 오동진 장군과 함께 지원했다. 이런 걸 보면 홍범도 장군은 무인 출신, 무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는, 대단히 지적이고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학식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홍범도. 그는 한때 머슴이었고, 포수였으며, 독립군 대장이었다. 그 인생의 마지막은 극장 경비원이었다. 1937년 옛 소련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극장 야간 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광복을 2년 남겨둔 1943년 76세를 일기로 머나먼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고려극장은 그가 타계하기 1년 전인 1942년 극작가 태장춘(1911~1960)이 쓴 각본에 따라 연극 <홍범도>를 본인 앞에서 공연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장군의 공훈을 기려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