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정신을 새기고 역사광복을 이뤄야
남영현 대한사랑 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대한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해야 할 때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후,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입법, 사법, 행정 및 군대 통솔권을 장악했다. 한국인의 저항과 독립의지를 꺾기 위해 헌병이 치안까지 담당하는 헌병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집회와 단체 운동을 일절 엄금했다. 심지어 교사에게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했다. 이런 폭압적인 무단통치로 민중의 삶의 피폐해져 갔다.
일제 치하 경제상황은 대한제국 말기보다 악화되었다. 일본인과 매국 관료들에게 전답을 뺏긴 농민들과 소작농들은 길거리로 쫓겨나 최하층민으로 전락하였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쌀값조차 폭등해 노동자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하였다. 이때 많은 백성들이 조선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만주를 무대로 하여 의병 활동도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갑자기 고종 황제가 승하하였다. 왕의 승하를 애도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 들었다. 친일파 이완용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반일 감정이 매우 격앙되었다. 나라를 뺏긴 백성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슬픔과 서러움, 일제에게 받은 핍박이 뒤섞여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을 담은 3.1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3.1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인 3.1 만세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은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략을 수정하고 독립운동의 상징인 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일제가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이 바로 밀정을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일제가 동남아까지 먹어치우고 승승장구하자 지친 몇몇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회유책에 넘어가 실제로 밀정이 되었다.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침투한 밀정들의 암약 때문에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지난 8월 13일 KBS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밀정들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다룬 ‘밀정’ 2부작을 방영하였다.
‘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 -영화 ‘밀정’에 나오는 대사 -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밀정에게 당할 때는 친구들, 잘 아는 사람에게 당했다. 그 사람들 주위에 누가 밀정인지 알 수가 없다. 독립군이 2천 명 결성됐다 하더라도 그 안에 밀정이 한 사람 있으면 그 조직은 와해되고 만다. 밀정은 그만큼 어떤 반민족 행위보다도 더 악랄하다.
KBS ‘밀정’ 1부를 보면 ‘배신의 기록’이 나온다. KBS 탐사보도부가 8개월간 끈질긴 추적 끝에 895명의 한국인 밀정을 찾아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밀정 행위는 가장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의 독립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그 긴 터널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공작에 매수되어서 밀정이 되었던 것이다.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을 때 그 재판정에 다른 청년들도 함께 나왔다. 안 의사 옆에 앉은 사람은 우덕순, 이토 저격을 위해 중국을 함께 건너 온 거사 동지였다.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동지였던 우덕순은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우덕순은 10년 뒤인 1920년 들어 이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얼빈에서 조선인민회 회장이 되어 있었다. 조선인 사회에 대한 일반인 정보뿐 아니라 밀정을 활용해 독립운동 상황을 내밀히 살피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사실상 일제의 밀정이 된 것이다.
“현 대한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은 키가 6척 1촌 5부, 얼굴은 타원형, 눈빛은 형형하고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유도, 승마, 권총 사격에 능하다. 총명함이 출중하며 좌담에 능하다. 해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라고 일제에 제공된 내용은 김좌진 장군 부대원이 일본에 직접 밀고한 내용으로 최측근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김좌진 장군의 비서이자 참모이던 이정이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정은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일제는 상해 임시정부 파괴공작을 할 때도 밀정을 활용했다. 임시정부 수립 소식에 비상이 걸린 일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독립운동가를 밀정으로 회유해 임시정부 내부에 은밀히 침투시키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 작전의 선봉에 선 사람은 3.1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아 다로였다. 사이토 총독에 이어 한반도 내 권력 서열 둘째였다.
우쓰노미아 다로는 조선관 사령관 시절을 포함한 15년 동안 일기를 남겼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인 1919년 10월 2일 목요일 우쓰노미아는 자신의 집무실에 한국인들을 불러들였다. 김상설이 김복을 데려왔다. “희망 없는 독립운동은 갈수록 조선인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니 일본에 의지해야 한다고 김복은 말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크게 수긍하는 듯했다.” 이후 김복은 밀정이 되었다.
김복의 본명은 김규흥이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했고, 우리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놀랍게도 백범 김구의 경호원도 밀정이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김구 선생은 임정 경무국장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과 비슷하다. 김구 선생에게 임시정부를 보호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독립운동가들이 언제든 죽여도 좋은 7가지의 적, 그중 하나가 고등경찰과 밀정이었다. 그러나 밀정은 늘 가까운 곳에 숨어 있었다. 김구와 함께 밀정을 적발했던 경호원 가운데 밀정이 있었던 것이다. 김구와 7년을 동고동락한 경호원 한태규가 밀정이었다. 김구 선생은 훗날 “그런 악한을 절대 신임했던 나야말로 세상에 머리를 들기 어렵다는 자괴심이 들었다.”라고 탄식했다.
심지어 의열단에서도 밀정이 암약했다. 일제는 의열단을 무력화하기 위해 김원봉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의열단의 거사는 갈수록 실패가 많아졌다. 밀정 때문이었다. 김원봉은 1925년 의열단원들과 홀연히 상해를 떠나 비밀리에 광저우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은밀한 동선이 밀정 때문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밀고자는 김호(본명 김재영)였다. 김재영은 의열단 활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자 애족장을 받았다.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 중에도 밀정이 끼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훈 과정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끊임없이 자료 발굴을 하여 독립운동사를 바르게 밝혀서 정립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세우는 또 하나의 길인 것이다. 올해로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가장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인 밀정! 조국을 팔아먹고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밀정! 그들의 숨겨진 악행을 끄집어내어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아울러 일제와 밀정에게 희생당한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 깊이 각인해 진정한 역사광복을 이뤄야 한다.
시청자 댓글 중에서
-
작성자 김00 “나는 이 영상을 보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내용임에 틀림없다고 자신한다. 꼭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
작성자 Chulhoon Jang 김좌진, 안중근의 밀정들은 정말 충격입니다. 895명보다 더 많은 밀정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에 대한 청산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데 정말 한숨이 절로 나오며 가슴이 먹먹하네요.
-
작성자 전00 밀정 너무 잔인합니다. 왜 제가 어렸을 때는 이런 밀정에 대한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을까요. KBS 대단합니다.
-
작성자 koyukiny 밀정이 895명이나 있었다니 진짜 대단하네요. 이것도 열람 가능한 공개된 자료에만 있는 이름일 것이고 공개되지 않은 자료엔 더 많은 밀정의 이름이 있겠죠. 그 밀정들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있다는 것도 어이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