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지 못했다고?
김창익 기자
식민지 유산의 극복 문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는다. 드골 대통령은 1944년 파리에 입성 직후부터 조국 프랑스를 배반하고 나찌에 부역한 자들을 찾아내 전부 숙청했다. 나치 협력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 15만 명이고 처형된 사람만 1만 명이 넘었다.
35년간 일제 식민통치를 받은 한국은 1945년 광복 후 어떠했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숙청 건의를 묵살하고 반민족 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도 해체시켜 버렸다. 친일파는 그대로 권력을 잡았고 그 재산은 보전되었다. 반민특위 해체는 역사학계에서 친일파 이병도와 식민사관을 살렸다. 이후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의 논리를 확대하고 재생산해 나갔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과 한국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이처럼 대비된다.
미국 오바마 정부 때 명예장관을 지낸 이홍범 역사학 박사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에서 한국 상고사의 왜곡 실태를 미국 지식인 사회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인은 식민지 유산(colonial legacy)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한국 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그 외의 국가에 있는 대다수 한국 전문가들은 식민지 유산의 덫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많은 한국의 사학자들이 이병도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을 닦은 데다 고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자료를 찾아내고 읽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골치 아픈 과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학계에서 식민사관을 추종한 사례가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모 역사재단이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와 합작하여 2013년에 출판한 『고대 한국 시대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은, 중국과 일본이 이중으로 왜곡한 한사군에 동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홍범 박사의 지적처럼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다.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잔재 때문에 한국의 역사는 심하게 왜곡되었다.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한국사
그동안 우리의 시원 역사를 왜곡하고 파괴한 여러 손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첫째는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이다.
중국은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한국은 중국에 매여 있는 속국이라는 중화 패권주의 사관에 따라 한국사를 축소·왜곡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공자의 『춘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자가 역사를 기록한 원칙을 흔히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춘추필법이란 무엇인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감추고(위국휘치爲國諱恥), 중국은 높이고 동이는 깎아내리며(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의 역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동이 역사는 간략하게(상내략외詳內略外) 기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 태종 이세민은 안시성 싸움에서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은 왼쪽 눈의 병독이 악화되어 4년 뒤에 사망했다. 당 태종은 아들 고종에게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국은 이 사실을 숨기고 이질,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허위로 기록했다.
또 중국 사서를 보면 대부분 한민족의 정식 국호를 제대로 쓰지 않고 별칭을 썼다. 예를 들어 단군조선 대신 구이, 숙신, 예맥, 동호, 청구 등으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옛 역사를 부정함과 동시에 한민족을 야만인으로 비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해 우리의 시원역사가 뿌리째 뽑힌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1910~1911년에 사서를 포함한 20여 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조선사를 말살하기 위해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조선사편수회를 이끈 구로이타 가쓰미, 이나바 이와키치, 이마니시 류 3인방은 식민통치라는 정치적 목적에 맞게 조선사를 왜곡하였다. 특히 이마니시 류는 ‘석유환국昔有桓國’에서 글자 한 자를 바꿔서 7천 년 역사를 제거해 버렸다. ‘너희들 역사는 다 신화의 역사다. 환인, 환웅,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다’라는 것이다. 이 식민사관이라는 ‘왜독倭毒’에서 우리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쓰다 소우키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고사기』·『일본서기』의 내용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삼국사기』는 신라를 강력한 고대 국가로 보고 왜를 작은 정치세력으로 보았다. 반면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란 식민통치 기관을 운영했다고 썼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것이 분명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지금까지도 한국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
셋째는 서양의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양독洋毒’이다. 이 유물주의, 실증주의 사관은 ‘유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세월이 흘러 사라지고 망각된다. 유물도 파괴되고 없어진다. 특히 상고사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실증주의에 치우치면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문헌 기록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공존하는데 유물주의에 빠진다면 정신문화를 외면하기 쉽다.
이처럼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인 ‘중독’과, 일제 식민사관의 ‘왜독’과, 서양 실증주의에 의한 ‘양독’의 폐해로 말미암아 우리 역사가 입은 상처는 너무나 깊다.
우리 스스로 왜곡한 한국사
우리는 한국사 왜곡에 대해 남 탓만 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도 되돌아볼 것이 있다. 한국의 대표 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두 사서가 없다면 한국사의 많은 내용을 알지 못하겠지만, 한편으로 두 사서는 한국 문화와 역사의 참모습을 알 수 없게 만든 한계점도 갖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사대주의 유학자 김부식이 중화주의·사대주의 사관으로 기록하였다. 중국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기록한 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고구려를 ‘진한秦漢 이후로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던’ 나라로 폄하하고, ‘중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중국을 한민족의 원수로 만든’ 나라로 취급하였다.
『삼국유사』는 불교 승려 일연이 썼기 때문에 불교사관과 신화의 영향이 크다. 환국을 불교 신화 속의 나라로 보아 ‘불가의 수호신인 제석帝釋(위제석야謂帝釋也)’이라 주석하였다. 이로써 『고기』가 온전하게 전한 ‘석유환국’의 소식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단군왕검도 1,908세를 살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게다가 단군이 제위에서 물러난 이유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기 때문이라 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가 마치 중국이 조작한 기자조선인 것처럼 갖다 붙였다.
이제 우리는 조작과 왜곡으로 얼룩진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광복을 선언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종교, 사상을 갖고 있든지 선조들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