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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리]

    서울 남산공원의 흑역사, 조선신궁

    민족정신 말살의 현장

    지금은 도심 속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 서울의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민족정기를 드높이는 공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100년 전 이곳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史郞이 : 선생님! 빨간 단풍이 물든 가을인데요, 숨 쉴 틈 없는 도심에서 이렇게 조금만 걸어 올라오니 대도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네요. 호연지기가 막 길러지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선생님 : 그렇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이곳에서 있었던 옛날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좀 아프네.

    史郞이 :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선생님 : 1910년 경술년이었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일제의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인에게 일본 혼을 심어 민족적 반항심을 없애고 충직한 황국 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라’는 통치 지침을 내렸어. 이 지침에 따라 그들은 우선 한반도 전역에 걸쳐 한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과 자료들을 모조리 수거하기 시작했지. 총독부는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조선 강토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문서를 중심으로 한 각종 도서 25여 만 권을 거둬들였어. 그중 아주 오래되고 귀한 것은 일본으로 빼돌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한데 모아서 불 질러 버렸어. 바로 이곳에서 말이야. 전해지는 말로는 그 연기가 일주일 넘게 남산 위로 피어올랐다고 해.


    史郞이 : 희귀한 보석이나 보물 같은 문화재보다 옛 우리 역사기록을 빼앗는데 더 관심이 컸었나 보군요. 그 이유는 조선인들을 말 잘 듣는 ‘일본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고요.

    선생님 : 그렇지.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역사 재료를 독점하고 자기네 마음대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기 위해서였지. 실제로 그들은 다음 단계로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라는 기구를 만들었어. 그리고는 자기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짜깁기하고 교과서를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 환국 배달 조선의 역사는 깡그리 무시했지. 그리고 중국사람 위만이 우리 역사의 시조이고, 이어서 한사군이 들어섰는데 그곳은 지금의 평양이었다든지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가 있어서 몇 백년간 식민통치를 당했다든지 말이야. 이런 엉터리 얘기를 지속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했지. 이렇게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불리한 갖가지 해괴한 이야기들이 그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

    史郞이 : 완전 엉터리 역사네요.

    선생님 : 그래, 그렇지. 세상 사람들이 엉터리 역사라고 안 받아들이면 좋은데, 그대로 믿어 버리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지. 심지어 우리나라 사람들까지도 말이야. 그때 만들어진 잘못된 역사 체계가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니? 외국의 세계사, 역사 지도 등에도 이 얘기가 마치 사실처럼 실려 있는 것이 현실이지. 심지어 중국과 일본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기네들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왜곡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야.사랑이는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건물’ 하면 뭐가 생각나니?

    史郞이 : 광화문에 있었던 조선 총독부 건물이 생각납니다.


    선생님 : 그래, 일제는 당시 경복궁 내 건물의 90%를 경매로 팔아먹고, 그 곳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었어. 그 건물은 10년의 공사 끝에 1926년에 완공이 됐지. 당시 서구식 건물로는 아시아에서 가장 컸다고 해. 그나마 남아있는 경복궁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버린 거야. 게다가 기존 경복궁의 일렬 축을 5.7도 정도 살짝 비틀어 기존 한양의 도시 배치 체계를 무너뜨리는 전형적인 수법을 사용했지. 그런데, 그보다 앞서 이 곳 남산에 엄청난 규모의 조선신궁이 문을 열었어.


    史郞이 : 신궁이라면 ‘신을 모시는 궁전’ 같은 것일 텐데. 조선신궁에는 누구를 모셨나요?

    선생님 : 조선신궁이라고 해서 단군을 모신 건 아니지. 일본 사람들이 가장 높이 받드는 일본 황실의 조상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제신祭神으로 안치했어. 메이지 천황도 함께 말이야. 지금 일본 최대의 중심 신사인 이세신궁에도 천조대신이 모셔져 있어.


    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 선거에 당선되면 제일 먼저 어디를 가는지 아니?

    史郞 : 이 우리나라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계신 현충원에 가죠.

    선생님 : 맞아.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은 선거에 당선이 되었을 때나 새해 하례식 때면 이세신궁을 찾아가서 천조대신에게 절을 올려. 이세신궁은 2020년 현재도 일본의 역사, 종교, 문화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인 셈이지. 일본이 근대화 이후에 서양 제국 흉내를 내면서 동양을 석권한 정신적 힘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 조선 신궁의 규모는 지금 남산 공원의 4분의 1정도가 되는 43만 제곱미터에 이르러. 조선신궁으로 가는 참배 도로는 숭례문 바로 옆에서 출발했어. 신궁 돌계단은 서울역에 기차를 내리면 곧바로 보였고, 서울의 사대문 안이면 어디서든 보일 정도로 규모가 컸어. 초대형 석조 도리이(鳥居)가 다섯 개나 있었지. 뭐든지 최고급, 초대형으로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이곳에 나무를 심는다고 학생들로부터 돈을 걷기도 했어. 하긴 어차피 관폐대사로서 격이 높은 신사라 건축비든 운영비든 국가재정 즉 식민지에서 수탈한 돈으로 조달했지만.


    史郞이 : 당시를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네요. 조선 총독부 청사와 조선 신궁을 거의 동시에 세웠다는 점도 의도가 엿보입니다.

    선생님 : 조선신궁과 총독부 청사는 남북의 요지에 위치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경성 전역을 공간적으로 압도했어. 두 건물은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지배를 상징하는 권력의 표상이었지. 이후 민족종교를 강력하게 탄압하면서 조선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국조를 버리고 일본인들과 똑같은 신을 받드는 신민이 되라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지.

    史郞이 : 신사 참배는 쉽게 말해서 조선의 조상을 섬기지 말고 일본의 조상을 섬기라는 건데, 반발이 엄청났겠군요.

    선생님 : 당연하지. 전을생 선생처럼 중국과 조선을 왕래하면서 일본 신사만 전문적으로 파괴하려고 노린 분들도 있었어. ‘신사 참배에 조선 민중은 반발이 없었다.’ ‘나라가 망했지만 독립 운동은 미온적이었다.’ 이런 논리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게 전형적인 통치자 입장의 논리, 주인과 손님이 바뀌는 논리지. 강도가 들어와서 아버지 어머니를 내쫓고 “내가 너희의 부모다!” 하고 독단을 치는데 그 누가 분노를 하지 않겠니? 다만 당시 언론이 완전히 일제에 장악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을 비롯한 정치권이 일제 잔재의 청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관련된 이야기가 묻히기 십상이었던 거지.


    지금 와서 나오는 일제는 신사참배의 강제성이 없었고, 우상 숭배를 싫어하던 기독교인들만 반발을 했다는 식의 주장도 위안부가 자원해서 돈벌이 갔다는 식의 웃기는 이야기지.

    史郞이 : 흠. 해방이 되고 나서는 일본 신을 받드는 신궁이 우리나라에서 버티기는 어려웠겠군요.

    선생님 : 그렇지,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는 총독령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신사의 위패를 소각하도록 했지. 이 곳 조선신궁의 신물은 일본으로 돌려보냈다고 해. 건물 자체는 그해 10월경에 그들 손으로 완전 철거 소각했어.

    史郞이 :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을성이 많은가 봐요. 제가 만약 그때에 있었다면 해방 당일에 달려가서 싹 불 질러 버렸을 텐데.

    선생님 : 헐~. 과연 그랬을까? 아무튼 그 뒤로 미군정 기간에는 이곳에서 대규모 정치집회가 열리기도 했고, 국회의사당을 건축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무산되었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혁명 때 철거되기도 했고. 나중에 남산공원이 조성되면서 식물원이 들어섰다가 없어지기도 했었지.

    史郞이 : 그렇다면 이젠 신궁의 흔적도 모두 없어졌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 김구 선생 동상도 들어서 있으니 민족정기가 온전히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 : 그게 말이야. 조선신궁 자리 조금 위에 지금의 남산타워 팔각정 자리에 단군왕검이 모셔져 있던 국사당國祀堂이 있었는데, 국사당은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란 뜻이야. 조선과 한양의 안녕을 위해 천제를 지내던 곳이었지. 그런데 일제가 가운데 글자 祀자를 師자로 바꿔 의미를 축소시키고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겨버렸어. 국사당이 국가 차원의 제사 공간에서 민간의 굿 당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지.

    나는 이게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를 생각게 하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봐. 지금 우리가 시급히 복원해야 할 것이 조선신궁이 들어서기 전에 남산에 있던 성곽일까 아니면 일제에 의해 뿌리 뽑히고 파괴된 우리의 올바른 역사일까? 불행했던 과거에 1천만 백성이 목숨을 빼앗긴 원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잘못된 역사의식이거든. ‘앎이 어렵고 행동은 쉽다’ 이것은 김구 선생이 안중근을 추모하면서 남긴 휘호야. 수백 명의 군사를 뚫고 들어가서 이등박문을 저격하는 것이 그렇게 된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보다 쉽다는 뜻 아니겠니? 우리 청년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이등박문 같은 침략자 수백 명이 쳐들어와도 이 나라를 굳건히 지킬 수 있지 않겠냐 이 말이지.

    史郞이 :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일본이 왜 역사를 파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앞으로 역사 공부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선생님 : 그래, 오늘 공부가 헛되지는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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