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의 현주소
박덕규 대한사랑 기자
식민사학이란 무엇인가? 또 식민사관은 무엇이며,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떤 사관으로 씌어졌는가?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일본 침략주의 식민사관이 시작되었던 때로 돌아가 보자.
식민사관의 시작
일제의 침략주의 식민사관이 태동한 때는 메이지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 열강의 압력으로 불평등 조약을 맺은 막부의 무능을 비판하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은 천황 중심으로 부국강병의 국가건설을 주창했다. 이후에 메이지 정부를 이끌어가는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문하생이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요시다 쇼인은 국체론(國體論)을 전개하면서 ‘존황정한(尊皇征韓)’ 사상을 주장했다. “천하는 일왕이 지배하며 백성은 일왕 아래서 평등하다.”는 존황론은 확장주의와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그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신무 일통 이래의 무덕武德’으로 평가했다.
정한론은 역사 침탈로부터 시작되었다.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는 일본인이 쓴 최초의 한국사인데, 일선동조론과 임나일본부설을 담고 있다. 1901년에 출간된 『조선근대사』와 1912년에 출간된 『조선통사』에는 한국사의 시작이 기자조선부터였고 위만조선과 한사군 등 외세의 지배를 거치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적혀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침략의 명분이자 식민사관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 1915년 중추원은 ‘조선반도사편찬과’를 구성하고 편찬 요지를 공포했다.
“반도사 편찬의 주안은 첫째,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족임을 명확히 아는 것, 둘째, 고대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피폐되고 빈약하게 된 것을 기술하여 합병에 의해 한국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논술하는 것에 있다.”(조선총독부, 『朝鮮半島史編成/要旨及順序』, 1916)
조선사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관, 즉 식민주의 사관의 틀에서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실증사학, 근대사학의 실체다.
1925년, 일왕의 명에 의해서 독립기관으로 조선사편수회가 구성되었다. 98만 엔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한국사 왜곡 프로젝트 『조선사』 편찬이 시작된 것이다.
식민사관의 핵심 세 가지
식민주의 사관이란 일제가 강점한 지역의 역사를 일본 사관의 틀에 맞춘 것이다.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가 주장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1920년대 내선일체론으로, 1930년대 황민화 정책으로 확대되었다.
한국사는 정체와 낙후의 악순환을 반복했다는 것이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주로 경제사학자들이 주장한 정체성론은 시혜론施惠論으로 발전해서 지금까지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타율성론他律性論은 한국사가 자율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주변 강대국의 지배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자율적인 독립의지가 결여되어 있으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만 타율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후에 이것은 반도사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사 왜곡의 뿌리
조선사편수회 3인방은 정체성론, 타율성론에 근거해서 민족을 부정하고 국통을 잘라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단군은 가공의 인물이며, 부여의 신인으로 조선민족의 신인이 아니다.”라고 했고, 이마니시 류는 “고구려와 대진은 중국사이며 한국사의 중심은 신라이고, 신라는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라고 주장했다.
“더러는 한국사가 고구려사에서 일어났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구려사는 별도의 계통을 이루어 발해, 금, 청, 만주의 역사에 연결된다고 여겨진다.”(이마니시 류의 스승 쯔보이 구메죠, 『신라사연구』 序)단군조선은 신화이고, 기자조선 때 비로소 국가가 성립했으며, 위만조선 때 철기를 받아들여 발전했다는 현재 한국사의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한사군 평양설과 임나일본부설은 반도사관에 의해 확고해졌다.
“단군은 제석천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신인으로 자손에 왕통을 잇지 않았다. 지방은 북조선을 중심으로 한다.”(이마니시 류, 『단군고』)
한국사의 현주소
한국전쟁이 끝나고 좌우의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때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한국인 어용사학자들은 다시 기세를 얻었다.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은 순국했지만, 어용사학자들은 살아남아 대학교수가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고, 학술원장과 중등교원임용기관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일본인 스승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을 이 땅에 고착시켰다.
요시다 쇼인 묘소에 참배하는 아베 총리(2013. 8. 13)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최태영 박사는 "1960년대가 되면서 단군을 신화로 보기 시작했다."라고 증언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식민사관을 가르치니 믿지 않았지만, 해방 후에 같은 한국 사람이 식민사관을 가르치니 믿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을 극복해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정치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성을 가진 신화’이고, 기자조선에 이르러서야 국가가 성립됐고, 위만조선이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발전했다고 말한다. 한사군은 평양에 설치된 것이 맞지만,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라 한반도 소국들의 발전에 기여한 ‘한漢나라 선진 문명의 유입로’라 봐야 하며, 임나일본부는 가야 땅에 있었지만 외교사절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식민사관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면, “역사적 사실이 그렇다.”라고 말한다. 일제는 실증사학, 근대사학이라는 현란한 말로 마치 자신들의 식민사관이 객관적이고, 고칠 수 없는 불변의 사실인 것처럼 한국인의 영혼에 주입해 놓았다. 누구도 저들이 만들어놓은 줄거리를 고치지 못하게 못 박은 것이다. 해방 후 사학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사관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인은 일본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를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