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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독립운동의 영원한 역사의 별 안중근

    이영훈 대한사랑 기자

    무더운 8월 어느 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년 전 무대의 막을 처음 연 이후 수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며 10주년 앙코르 공연을 맞이한 명품 「뮤지컬 영웅」을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현장 공연을 보고 느낀 감동은 광복절 날 TV 화면으로 보던 것과 이어폰을 귀에 꽂고 휴대폰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뮤지컬은 안중근(1879~1910) 의사의 거사를 앞둔 시점부터 다루었다. 안 의사의 삶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가치관이 형성되는 어릴 적 생애를 알아야 하리라.


    안 의사와 백범 김구의 인연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고려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세손(본관: 순흥順興)이자 아버지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안인수가 400백 석지기 토지를 소유하고 해주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였기에 의사의 집안은 부유했다. 의사는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 기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적에 응칠應七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의사는 어릴 적부터 집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고구려 때 태어났다면 ‘주몽’이라 불릴 수 있는 명사수라는 소문이 났다.

    의사의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괴롭히는 가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 그 뒤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 전투’ 등 기습전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후일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두 거인이 인연을 이루는 순간이 있었다.


    19살 백범 김구와 16살 안중근!

    백범이 동학농민군의 접주로 활동하던 중 1895년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관군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 황해도 신천 안태훈의 집이었다. 김구의 사람됨을 보고 갑오의려甲午義旅 대장인 안태훈 진사가 지켜주었다. 안 진사가 김구에게 밀사를 보내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겠다. 군이 무모하게 싸우다 죽으면 인재가 아깝다’는 뜻을 전했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안 의사의 조카 안미생은 백범의 장남 김인과 결혼해 맏며느리이자 비서로 일했고, 막내아우 안공근도 임시정부의 핵심 참모로 활약했다. 그리하여 백범 가문과 안 의사 가문은 사돈지간에 머물지 않고, 몇 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동지로 결합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안 의사는 1895년에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사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다. 천주교는 청국에서 전도하던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생겼다. 9천 년 동안 조선 민중이 믿고 모셔왔던 상제가 곧 천주라는 가르침을 전파되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부에서 선교사가 들어와서 천주교를 뿌리내리지 않고 천주교가 자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의사는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운동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하였지만 한계를 느끼고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이듬해 1908년 7월 의사는 전제덕全齊德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사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 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동지 11인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1909년(융희 3) 초, 안 의사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의사는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뮤지컬은 시작은 바로 이 시점부터 다룬다. 안중근 의사와 뜻을 함께하는 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하는 마음을 노래한다. ‘단지동맹’이라는 제목의 첫 노래부터 이 뮤지컬이 왜 10년 동안 사랑을 받아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단지동맹 맹세의 노래


    침략 원흉 이토의 죄를 묻다

    그 이후로 나오는 ‘영웅’, ‘장부가’에서 의사의 정의롭고 강인한 마음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가장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죄인인가’에서는 의사의 역사인식과 비판의식이 어느 정도로 치밀했는지 볼 수 있었다. ‘이토의 죄 15개조’는 사실 1차 검찰심문 당시 말한 것이었다.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광산·산림·천택川澤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은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왕을 속인 죄
    14.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왕의 아버지 태왕을 살해한 죄


    이중 1조와 15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이토가 조선 통감으로 있던 시기에 이뤄진 일이다. 따라서 의사의 저격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사는 이토를 무엇보다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인물로 지목했다. 심문 당시 일본 검찰관은 이토가 동양평화를 주창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자, 의사는 “일본 왕과 이토가 주장한 동양평화는 대한제국과 다른 나라를 속이기 위한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답했다.

    ‘누가 죄인인가’ 속에서도 판사가 “피고 안중근, 피고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라고 하자

    안 의사는 이렇게 외친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것이 참된 영광이니 나 기꺼이 받아들이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저들의 거짓과 야욕에 속지 마시고 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 주시오.”

    의사는 이토를 사살한 죄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3월 26일 순국했다.


    안중근, 불멸의 삶을 살다

    뮤지컬 속에서 가장 와 닿지 않고 의구심이 갔던 부분이 바로 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부분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동양의 평화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토를 죽이는 거사에 참여한 불멸의 삶을 산 영웅 안중근을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한 나약한 인간으로 표현한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극작가가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고 싶었는지는 모르나 영웅의 심법세계를 모르고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지인이 조상님의 독립운동 활동을 밝히기 위해 일본에서 자료를 찾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자료를 찾던 중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동학의 거두였던 한 인물의 잘린 목을 촬영한 사진 한 장이었다고 했다. 나의 의아해하며 왜 그 사진이 그토록 충격과 감동을 주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놀라운 답변이 나왔다. 사진 속 얼굴에서는 그동안 보아왔던 일반적인 사진에서처럼 어떤 두려움과 고통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서 모든 것을 해탈한 듯한 평화로운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부처의 표정같이 옅은 미소까지 보였다고 한다.

    안 의사 또한 그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죽음 앞에 의연한 것이 영웅이다. 죽음을 초극해 불멸의 삶을 사는 자가 영웅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서 일반인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헌신의 삶을 사는 자가 만인에게 영웅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날을 기약하며’라는 노래를 들으며 내 눈가엔 눈물이 맺히고 다시금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게 해주신 영웅 안중근과 수많은 무명 독립운동 투사들께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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