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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강좌]

    문헌을 통해 본 「천부경」의 전수 내력

    전재우 대한사랑 기자

    요즘 방영되고 있는 화제의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를 보면 천부인 이야기가 나온다. 무백(대칸부대의 전사, 박해준 분)이 아사사칸(흰산의 어머니, 손숙 분)을 찾아가서 “제가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자 아사사칸은 “천부인에 대해 아느냐?”라고 말문을 연다. 무백은 “아이르주(태양의 신)께서 천부인 세 가지를 내려 보내 이 세상을 여셨다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사사칸은 “그 천부인 세 가지가 무엇이냐?” 하고 무백에게 묻는다. 무백은 “칼과 방울, 그리고 거울 아닙니까?”라고 아사사칸에게 대답한다. 아사사칸은 “그래. 그리고 세상을 끝낼 때에도 세 개의 천부인을 내려 보낸다 하셨다.”라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천부인을 ‘세상을 베는 칼’과 ‘세상을 울릴 방울’ 그리고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있는 환웅천황의 배달 나라 건국에 등장하는 ‘천부인天符印’이 〈아스달 연대기〉드라마에 소개된 것이다. 「천부경」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천부인 세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드라마의 소재로 이용된 것은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흥미를 더해 준다.

    「천부경」을 언급한 수많은 서적이 출판되었다. 또 학위논문과 학술논문도 있지만 아직도 「천부경」의 진면목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천부경」은 심지어 근대에 만들어진 위서로 내몰리는 실정이다. 하지만 「천부경」을 제대로 안다면 의문이 저절로 풀어질 수 있기에 문헌을 통해 「천부경」이 전수되는 내력을 살펴보면서 「천부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천부경」 연구 현황 단 행 본 : 130여 종 출간 학위논문 : 77건 ; 박사학위 23건, 석사학위54건 학술논문 : 199건 (자료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학술연구정보서비스)


    1. 문헌을 통해 본 「천부경」의 의미

    천부天符는 무엇인가? 천부인의 세 가지는 무엇일까?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이암李嵒과 이맥李陌 그리고 이기李沂가 말하는 천부天符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①이맥李陌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거울(天符刻鏡), 삼신을 맞이하는 북(迎鼓), 백 명이 무장한 검(佰劒)으로 세 가지 신물을 말하고 있다.

    「천부경」의 세 가지 신물


    風伯은 天符刻鏡而進하고 雨師는 迎鼓環舞하며 雲師는 佰劒陛衛하니라.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풍백은 「천부경」을 거울에 새겨 진상하고, 우사는 북에 맞추어 둥글게 춤을 추고, 운사는 백 명을 칼로 무장시켜 제단 밑에 늘어서서 지켰다.

    ②행촌 이암李嵒 선생의 문집인 『태백진훈太白眞訓』 「하편下篇」에 보면 최영崔瑩 장군이 천부인이 무엇인지 묻는 장면이 있다. 최영 장군이 천부인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행촌 선생은 최씨 무신정권을 마감시킨 류경柳璥의 가장구전家藏舊傳을 인용하면서 부符와 인印에 대해서 대답했다. 부符는 지위리 환인천제께서 환웅에게 부를 쪼개어 주고 관작을 내려주면서(割符世封) 삼신의 맹세를 주었다(授三神之誓)고 하며, 인印은 환웅에게 옥새(印璽)를 주어 지위리 환인천제와 동등하게 하니 신고神誥와 고명誥命(왕위를 승인하는 문서)과 인새印璽(옥새)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최영이 천부인이 무엇인지 묻다


    又問天符印ㅣ何稱고한대 先生이 曰柳文敬公璥의 家藏舊傳에 云호대 符는 天帝智爲利桓仁이 命庶子雄하야 割符世封하고 授三神之誓오 印은 賜庶子雄印璽하야 與天帝로 同하니 曰神誥와 曰誥命과 曰印璽ㅣ三個也라하니 頗爲近理也니라 (『태백진훈太白眞訓』 「하편下篇」) 또 묻되 하늘 부인은 무엇을 일컬음이오, 하니 선생이 이르시기를 류문경공경의 가장구전에 이르되 “천제 지위리 환인이 서자 웅에게 명하여 대쪽을 쪼개어 대로 떼어 주고 삼신의 맹세를 주며, 인은 서자 웅에게 인사(어보)를 주어 천제와 동등 되게 하니 이르되 「신고」와 「고명」(왕위를 승인하는 문서)과 인사 세 개라.”하니 자못 이치에 맞다고 하겠다.

    ③ 계연수는 〈계연수기서桂延壽寄書〉에서 스승인 이기李沂의 말을 인용하여 천부삼인天符三印에 대해서 전했다. “삼인三印이 무슨 물건인지 어떠한 보물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 천부는 바로 가르침을 베푼 경전으로서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는 곳이 남아 있다.”라고 했다. 이기는 천부天符를 가르침을 베푸는 경전(設敎之經)으로 말한 것이다.

    ‘천부天符’가 바로 「천부경」


    持天符三印하시고 自天降世하사 德化大行于今四千餘年이라 事在鴻濛에 未知三印이 爲何物이오 如何寶物 而天符난 卽設敎之經也라 (〈계연수기서桂延壽寄書〉, 『단탁』, 1921) 천부天符와 삼인三印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그분의 덕화가 지금까지 4천여 년 동안 크게 행해져 왔다. 그 일이 분명치 않아 삼인이 무슨 물건인지 어떠한 보물인지 알지 못하지만, 천부는 바로 가르침을 베푸는 경전이라.

    2. 문헌을 통해 본 「천부경」의 전수 내력

    환국시대


    ○ 「천부경」은 인류문화사 최초의 경전이며, 동서 문명의 근원인 중앙아시아 천산 동방에 있었던 환국의 지도자 안파견 환인이 삼신상제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최초의 묵시록이다.

    天符經은 天帝桓國口傳之書也라. (「소도경전본훈」) 「천부경」은 천제 환인의 환국 때부터 구전되어 온 글이다

    배달시대


    桓雄大聖尊이 天降後에 命神誌赫德하사 以鹿圖文으로 記之러니 (「소도경전본훈」) 환웅천황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태백산으로) 내려오신 뒤에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桓雄天王이 肇自開天으로 生民施化하실새 演天經하시며 講神誥하사 大訓于衆하시니라. (「삼성기 하」)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동방 배달민족의 새 역사 시대를 열고 백성에게 교화를 베푸실 때, 「천부경」을 풀어 설명하시고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론하여 뭇 백성에게 큰 가르침을 베푸셨다.

    世傳桓雄天王이 巡駐於此하사 佃獵以祭하실새 風伯은 天符刻鏡而進하고 雨師는 迎鼓環舞하며 雲師는 佰劒陛衛하니라. (「삼한관경본기」)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해 온다. 환웅천황이 이곳에 순행하여 머무르시면서 사냥하여 제사 지내실 때, 풍백은 「천부경」을 거울에 새겨 진상하고, 우사는 북에 맞추어 둥글게 춤을 추고, 운사는 백 명을 칼로 무장시켜 제단 밑에 늘어서서 지켰다.

    ○ 최초의 「천부경」 주석서는 발귀리發貴理의 송가이다. 태호복희씨와 동문수학하고 자부선사紫府仙師의 조상인 발귀리가 아사달에 와서 제천 행사를 보고 예식이 끝난 후에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그 내용은 「천부경」을 풀이한 것이었다.

    神市之世에 有仙人發貴理가 與大皞로 同門受學하고 而道旣通에 遊觀乎方渚風山之間하야 頗得聲華라. 及觀阿斯達祭天하고 禮畢而仍作頌하니 其文에 曰 「大一其極이 是名良氣라 無有而混하고 虛粗而妙라 三一其軆오 一三其用이니 混妙一環이오 軆用無歧라 大虛有光하니 是神之像이오 大氣長存하니 是神之化라 眞命所源이오 萬法是生이니 日月之子오 天神之衷이라 以照以線하야 圓覺而能하며 大降于世하야 有萬其衆이니라 故로 圓者는 一也니 無極이오 方者는 二也니 反極이오 角者는 三也니 太極이니라.」 (「소도경전본훈」)

    조선시대


    ○ 구환을 통일한 국조 단군은 ‘천부天符는 만세의 법전(萬世之綱典)’이라 하였다.

    乃召國人하사 立約曰 自今以後로 聽民爲公法하노니 是謂天符也라 夫天符者는 萬世之綱典이오 至尊所在니 不可犯也라 하시고 遂與三韓으로 分土而治하실새 辰韓은 天王自爲也시라 立都阿斯達하시고 開國하사 號朝鮮하시니 是爲一世檀君이시오 阿斯達은 三神所祭之地로 後人이 稱王儉城하니 以王儉舊宅이 尙存故也니라. (「삼한관경본기」) 이때에 나라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공약하셨다. “오늘 이후로는 백성의 뜻을 들어 공법을 삼노니, 이를 천부天符(하늘의 법)라 이르노라. 무릇 천부는 만세의 법전이요, 지극한 존엄성이 담겨 있으니 범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마침내 삼한으로 영토를 나누어 다스릴 때 진한辰韓은 천왕께서 친히 맡아서 통치하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바로 1세 단군이시다. 아사달은 ‘삼신께 제사 지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王儉城이라 불렀는데, 그 까닭은 왕검의 옛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國子師傅有爲子가 獻策曰 惟我神市는 實自桓雄으로 開天納衆하사 以佺設戒而化之하시니 天經神誥는 詔述於上하고 衣冠帶劒은 樂効於下하야 民無犯而同治하고 野無盜而自安하야 (「단군세기」) 11세 도해 단군 때 국자랑國子郞을 가르치는 사부 유위자有爲子가 헌책하여 아뢰기를 “우리 신시는 실로 환웅천황께서 나라를 연 이래 무리를 받아들여 ‘전佺의 도’로써 계율을 세워 교화하였습니다. 「천부경」과 「삼일신고」[天經神誥] 는 환웅천황께서 밝히셨고, 의관을 갖추고 칼을 카고 다니는 풍속은 아래에서 즐거이 본받았습니다. 이에 백성은 법을 범하지 않고 한결같이 잘 다스려졌으며, 들에는 도적이 없어 저절로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사국四國시대


    ○ 사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을파소乙巴素, 신라의 박제상朴提上과 최치원崔致遠이 「천부경」의 전수과정에 등장한다. 「참전계경」을 엮은 을파소는 첫머리에 원방각을 풀어 〈천부天符 삼미三美 십이도十二圖〉라는 도해圖解를 게재하였다. 이 부분을 연구한 단학회 4대 회장 이덕수는 을파소가 원방각의 도해를 그린 것은 「천부경」을 자세히 살피고 검토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라 보았다. 신라의 박제상은 『징심록』을 지어 전했는데 현재 15지誌 중 첫째인 『부도지』만 전한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신지神智의 「천부경」을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고 「소도경전본훈」에 기록되어 있다.

    ○ 고구려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국상 을파소乙巴素, 〈천부삼미십이도天符三美十二圖〉(「참전계경」 권두에 삽입) 을파소乙巴素가 이미 참전계경參佺戒經 첫머리에 천부삼미십이도天符三美十二圖를 게재하였은즉 을파소乙巴素가 「천부경」天符經을 고거했었을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라고(벽산이덕수설碧山李德秀說)도 했다.(『대배달민족사』 3권 「천부경」)

    ○ 신라초 박제상朴提上의 『징심록澄心錄』

    桓因氏之子桓雄氏ㅣ 生而有大志하야 繼承天符三印하고 修禊除祓하고 立天雄之道하야 使人知其所由러라 (『징심록澄心錄』 「부도지符都志」 11장) 환인桓因씨의 아들 환웅桓雄씨는 태어날 때부터 웅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天符와 삼인三印을 이어받고 계禊 제사와 불祓 제사를 지냈으며, 천웅天雄의 도를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 내력을 알게 하였다.(「부도지」 11장)

    於是에 移黃穹氏之裔六萬이 守之하고 乃割木作桴八萬하야 刻信符流放於天池之水하야 招四海諸族하니 諸族이 得見信桴하고 次第來集하야 大開神市於朴達之林하고 修禊淨心察干天象하야 修麻姑之譜하야 明其族屬하고 準天符之音하야 整其語文이러라 又奠定北辰七耀之位하야 燔贖於盤石之上하고 會歌而奉天雄之樂이러라 諸族이 棌七寶之玉於方丈方壺之堀하고 刻天符而謂之方丈海印하야 辟除七難而歸라 (「부도지符都志」 14장)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 명을 부도로 이동시켜 지키게 하고, 이에 나무를 베어 뗏목 8만 척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제 족속을 초청하였다. 제 족속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발견하고, 차례로 모여 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었다. 계 제사를 지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천체의 현상을 살펴서 마고의 족보를 찬수하고 그 족속을 밝혔으며, 천부天符의 소리에 의거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확립하고, 큰 돌 위에서 속죄의 제물을 불태웠으며,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음악을 받들었다. 제 족속이 방장산方丈山 즉 방호산方壺山의 굴堀에서 칠보의 옥을 캐어 천부天符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였으며,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부도지」 14장)


    崔孤雲致遠이 亦嘗見神誌篆古碑하고 更復作帖하야 而傳於世者也라 (「소도경전본훈」)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신지의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대진국大震國시대


    ○ 대진국의 태조 대조영大祚榮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에 「천부경」이 수록되어 있다. 또 4세 문황제는 태학을 세워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쳤다.

    檀君天符經 神智篆見於 古碑文之 文昌侯 崔孤雲先生 解其字 刻于太白山 (『단기고사』) 太子欽武가 立하시니 改元曰大興이오 自東京龍原府로 移都于上京龍泉府하시고 明年에 立太學하사 敎以天經神誥하시며 講以桓檀古史하시고 又命文士하사 修國史一百二十五卷하시니 文治는 興禮樂하고 武威는 服諸夷하야 太白玄玅之道가 洽於百姓하고 弘益人間之化가 賴及萬方이러라. (「대진국본기」)

    고려시대


    ○ 고려 후기 승려 일연(1206~1289)과 문신 이승휴(1224∼1300)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천부인을 언급하였다.

    古記에 云 昔有桓國하니 庶子桓雄이 數意天下하야 貪求人世어늘 父知子意하고 下視三危太伯하니 可以弘益人間이라. 乃授天符印三箇하사 遣往理之하시니라. (『삼국유사』 「고조선」)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서자부의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거늘, 환국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이런 뜻을 아시고 아래로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아들에게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주어 그곳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셨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 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云云) (『제왕운기帝王韻紀』 권하卷下) 처음으로 어느 누가 나라를 열고 바람과 구름을 인도하였던가, 제석帝釋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다.(『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이름이 웅雄이다. 운운.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서 삼위산과 태백산에 이르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웅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귀신 삼천을 거느려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이른다. 운운.)

    ○ 고려 말의 충신 최영 장군이 행촌 이암에게 천부인에 대해서 직접 묻는 장면이 행촌의 문집 『태백진훈』에 기록되어 있다. 최씨 무신정권을 종결시킨 류경柳璥의 가장구전家藏舊傳을 인용하면서 부符와 인印을 설명을 하였다. ‣ 유경(1211∼1289) ‣ 행촌 이암(1297∼1364) ‣ 최영(1316∼1388)

    기록상 최초의 주석서는 고려 말에 있었다고 한다. 행촌 이암의 문하생 이색과 범세동이 주해註解를 했지만 지금은 볼 수 없어 아쉽다.

    ○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과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이 모두 「천부경」 주해를 남겼다고 하나 오늘날 찾아볼 수 없다.

    世傳牧隱李穡과 伏崖范世東이 皆有天符經註解云이나 而今에 不見이오. (「태백일사」)

    조선시대


    ○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신라의 박제상이 왜국에 가서 구한 신라 왕자의 후손이다. 그는 박제상의 『징심록澄心錄』을 읽고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를 지었다. 『징심록추기』에는 ‘천부금척天符金尺’, ‘금척지법金尺之法’, ‘천부지리天符之理’, ‘천부지법天符之法’이라는 말도 나온다.

    余嘗讀金尺誌其數辭甚難不可了解 大抵其本卽天符之法 而製之以金者爲其不變也 作之以尺者爲其無誤也 不變而無誤則天地之理盡矣 誌中所謂日月星辰金土氣水之本 一存於不變之道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 제8장) ○ 조선 성종에서 중종 시기에 활동한 문인 이맥李陌(1455~1528)이 저술한 『태백일사』에는 「천부경」 81자 원문이 온전하게 수록되어 있다.

    今時俗이 雖一字之書라도 不合於程朱則衆矢蝟集하고 儒鋒方厲하니 其欲傳天經神誥之訓이나 豈容易得論哉아. (「소도경전본훈」) 지금의 시대 풍조가 한 자의 글이라도 정주학에 부합하지 않으면 뭇사람의 비판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유가의 예봉이 금시라도 날아올 듯하니,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들 어찌 쉽게 논할 수 있으리오?

    ○ 조선 중기의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격암유록格庵遺錄』에서 ‘「천부경」은 진경眞經’이라 하였다.

    辰巳聖君正道令이 金剛山精運氣받아 北海島에 孕胎하여 東海島에 暫沈터니 日出東方鷄鳴聲에 南海島로 天受大命指揮故로 紫霞島에 定坐하사 盡心竭力修道中에 寅卯時에 心轉하여 日月山上焚香再拜一心으로 天井水에 祝福하고 聖神劒을 獲得守之丹書用法天符經에 無窮造化出現하니 天井名은 生命水요 天符經은 眞經也며 聖神劒名掃腥塵에 無戰爭이 天下和라 (『격암유록格庵遺錄』 「송가전宋家田」) 진사년에 정도령이 금강산의 정기를 받아 북해도에서 잉태되어 동해도에 잠시 머물다 동방에서 해가 뜰 때 계명성에 남해도로 건너와서 하늘에서 큰 명령을 받은 고로 자하도에 정좌하시어 진심갈력으로 수도 중에 인묘시에 마음을 돌려 일월산 위에 높이 올라 향을 피우고 절을 하여 천정수를 축복하고 성신검을 획득하고 지켜서 단서용법의 「천부경」의 무궁한 조화가 출현하니 천정의 이름은 생명수요, 「천부경」은 진경이며, 성신검은 세상의 모든 티끌을 없애는 이름이라. 전쟁이 없어지니 천하가 화평하다.

    ○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조선 숙종 2년(1675년)에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천부삼인天符三印이 기록되어 있다.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규원사화揆園史話』 「조판기肇判記」) 천부天符의 세 가지 인印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이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

    ○ 정조 5년의 신축(1781)년에 지은 구월산 「삼성사치제문三聖祠致祭文」에는 「천부경」을 ‘천부보전天符寶篆’이라 기록했다. 「삼성사치제문」은 정조 11년(1787)에 간행된 『문원보불文苑黼黻』에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내각內閣 지제교知製敎였던 이병모李秉模(1742~1806)가 지었다. 삼성사는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사당으로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진산인 구월산九月山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구월산’이 세상에서 ‘아사달산’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鎭山九月 在縣東 世傳阿斯達山) 天符寶篆은 事雖無徵이나 神聖相仍하사 東史攸稱이니 世傳幾葉고 澤留千蓂이로다 崒彼阿斯는 地以人靈하도다 廟因舊改하고 禮重溯源하나니 (『문원보불文苑黼黻』) 천부보전天符寶篆은, 일을 비록 증명할 수는 없지만, 신성神聖(제왕)들이 서로 이었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컫는 바이니 세상에 전해진 지 몇 세대인가? 은택이 천 년에 남겨졌도다. 높은 저 아사달은, 그 땅이 사람 때문에 신령스럽게 되었다. 사당은 옛 제도에 따라 고치고…

    ○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천부경」 애독과 탐구 이유립 선생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천부경」을 탐구했다고 했다. 조영주는 기정진이 애독한 바 있으나 주석까지는 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문제자門弟子 청호옹淸湖翁 최씨崔氏의 역술譯述을 이어받은 그 문인門人 김형탁金炯鐸이 8.15 후 병신년(1956)에 완성하여 이듬해 정유년(1957)에 출판했다고 하였다. 기정진 계열에서 전하는 본에는 ‘석삼극析三極’의 ‘석析’이 ‘석釋’으로 ‘묘연妙衍’의 ‘연衍’이 ‘연演’으로 ‘인중천지人中天地’의 ‘지地’가 ‘중中’으로 바뀌어 있다.

    계연수桂延壽는 근대 최초의 「천부경」 주석본인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1899)를 지었다. 계연수는 스승 이기와 함께 『태백일사』에 수록된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뽑아내어 책으로 간행을 하였으며, 「참전계경」과 『태백진훈』을 더해서 ‘홍익사서弘益四書’라 이름하였다. 계연수은 『천부경요해』에서 81자의 「천부경」 전문을 아홉 장章으로 구분하였다. 아홉 장은 제1장 일시一始, 제2장 삼극三極, 제3장 일삼一三, 제4장 무궤无匱, 제5장 이삼二三, 제6장 대합大合, 제7장 운환運環, 제8장 묘연玅衍, 제9장 중일中一이다.

    桓雄天王이 以天降之姿로 至神兼聖하시사 能代天而立敎하야 標的萬世하시니 此天符經之所以作也시니라. 今經殘史沒之餘에 幸得此經於太白逸史而抽出하야 作本單行하고 添以要解하야 名之曰天符經要解라 是爲跋하노라. 환웅천왕께서 하늘이 내린 자질을 가지고 지극히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겸하셔서 능히 하늘을 대신하여 가르침을 세우고 만세를 목표로 삼으셨으니, 이것이 「천부경」을 지은 까닭이다. 오늘날 경전은 잔결되고 역사는 매몰된 후에, 다행히 이 경을 『태백일사』에서 뽑아낼 수 있어서, 책을 만들어 단독으로 간행하고 요해要解를 붙여서 이를 ‘천부경요해’라 이름 하였다. 이를 발문으로 삼노라.(계연수, 「천부경요해발天符經要解跋」)

    근·현 대시대


    ○ 정훈모의 《단군교종령》(1913. 7. 31.) 55조에 ‘천부경’ 술어 등장

    ○ 단해檀海 이관집, 『천부경직해天符經直解』 완성(1914. 3. 16.)

    ○ 계연수桂延壽와 이태집李泰楫이 1916년 9월 9일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고각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천부경」이 비로소 세상에 다시 전해지게 되었다. 1917년 1월 10일 계연수는 이 발견 경위를 글로 써서 단군교에 보내었는데 그것이 「계연수기서桂延壽寄書」이다.


    ○ 이단해 『천부경직해天符經直解』 인쇄(1917. 5.)

    ○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북경, 1920) 「천부경」 전문과 주석 수록(1919. 음력 3월 작성) 20세기 초, 전병훈은 「천부경」을 외국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평안남도 삼등현 출생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50세 때인 1907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원세개·여원홍 총통으로부터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다. 북경에서 『정신철학통편』을 마무리할 쯤 「천부경」을 소개받자 책 출간을 미루고, 「천부경」을 연구하여 전문과 주석을 실어 발간하였다. 『정신철학통편』은 당시 세계 29개 나라 150여 대학에 보내졌다.

    ○ 『단탁』, 『조음』의 「계연수기서」 기사(1921)

    ○ 김택영金澤榮의 『소호당집속韶濩堂集續』(북경, 1924년)과 『차수정잡수借樹亭雜收』(북경, 1925) 김택영도 1905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역사서를 많이 편찬하였다. 김택영은 1924년에 북경에서 「천부경」 전문과 주석을 출간하였다.

    ○ 최국술의 《최문창후전집》중 《고운선생사적》(1925)에 「천부경」 전문 수록 ○ 김용기의 『단전요의檀典要義』(1925)


    ○ 『단군교부흥경략』 「천부경」(1937) 단군교에서 발간한 『단군교부흥경략』에는 녹동서원의 강사였던 노주蘆洲 김영의金永毅의 「천부경」 주석본 「천부경주해天符經註解」가 실려 있다.

    ○ 박장현의 『중산전서中山全書』 중 『해동춘추』(1937)에 「천부경」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박장현은 이유립 선생과 함께 녹동서원에서 1기로 공부한 동기생이다.

    ○ 이유립, 계연수 『천부경요해』의 후서後序 작성(1949)

    國未亡也에 桂先生이 先取天符經而作要解하시니… 國旣亡也에 先生이 又編桓檀古記而作凡例하시니… (「천부경요해후서天符經要解後序」 중) 나라가 망하기 전에 계연수 선생이 먼저 「천부경」을 뽑아서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를 간행하고… 나라가 망한 후에는 또 『환단고기』를 편찬하고 범례를 지으시니…

    ○ 이유립, 『천부경연해天符經衍解』(1953)

    ○ 김형탁金炯鐸, 『단군철학석의檀君哲學釋義』(1957) 간행 노사 기정진 계열의 김형탁이 「천부경」 주석서인 『조선철학석의朝鮮哲學釋義』(모필본, 1957), 『단군철학석의檀君哲學釋義』(활자본, 1957)를 간행하였다. 김형탁은 「천부경」을 천지인天地人 삼극의 ‘삼극지서三極之書’로도 칭하였다. 김형탁 아들 김종성金宗性은 「천부경」을 ‘전비문篆碑文’이라 불렀다고 한다.

    ○ 한규성韓圭性, 『(단군檀君) 천부경강론天符經解論』(1968) 『노소문답老少問答 역학원리강화易學原理講話』의 저자인 한규성도 「천부경」 해설서를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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