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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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연구가 필요한데 인하대 대학원 융합고고학과 복
기대 교수가 발표한 「‘간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란 논문은 이 점을 시원하
게 해소시켜 준다. 수년간의 사료 추적을 통해 간도의 위치와 영토문제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간도문제가 혼란에 빠진 이유
간도 위치가 혼란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국경이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넘은 적이 없다는 인식이다. 조선이 중국의 영토를 침략하였다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다음은 ‘백산정계비’와 ‘백두산정계비’의 혼동이다. 백산정계비는 조선 숙
종 때 국경인 백산에 세운 비석이고, 백두산정계비는 1900년대 초 일본이 대한
제국의 동의 없이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국경선으로 세운 비석이다. 그런데 일본
은 백두산정계비에 백산정계비의 내용을 넣었고, 훗날 세워진 백두산정계비가
백산정계비로 둔갑했다. 다른 하나는 『대동여지도』이다. 이 지도는 매우 강렬하
게 백두산정계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1860년대 기록의 국경선은 『대동여
지도』의 국경선과 전혀 다르며, 1800년대 중반기에 쓰인 『대동지지』에서 압록강
이북의 지명들이 『대동여지도』에서 모두 압록강 남쪽에 새겨져 있다.(논문초록 중)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빼앗기면서 간도가 중국 영토로
일본은 1905년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청
나라를 끌어들여 러시아가 빠진 만주지역과 대한제국의 영토를 구체적으로 나
누기 시작했다. 1907년 일본은 청나라와 협의하여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국경을
지금의 압록강으로 하고 동북쪽은 길림의 안도(安圖)로 정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화룡욕(和龍峪)’의 서쪽 일대를 서간도로, ‘광제욕(光霽
峪)’의 동쪽 일대를 동간도로 나누었다. 쉽게 말하면, 현재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
족 자치주 지역을 두 지역으로 나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북으로는 ‘슬해
(瑟海)’가 러시아와 맞닿아 있어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복수를 꾀하고 있어
일본으로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1909년, 일본은 청나라와 뜬금없이 ‘간도협정’을 맺으면서 대한제국의 북관지
역을 청나라에게 떼어 주었다. 러시아와의 격전 예상지역에 청나라를 끌어들여
완충제 역할을 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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