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1 - 대한사랑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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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우크라이나 전쟁의 시작 이에 반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는 무력 진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동
부 반군 지역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였으며,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이번 전쟁은 표면적으로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에서 비롯되었으나, 실
절차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질적으로는 2014년 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동부 지역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된 바 러시아는 사태를 관망만 할
우크라이나는 1991년 독립 이래 집권세력에 따라 친서방 또는 친러시아 노
수는 없다고 우크라이나의 비(非)군사화와 비(非)나치화를 내세우며 소위
선을 취했다. 2004년 대통령선거에서 동남부 지역의 지지를 받는 친러 성향
‘특수군사작전’을 편 것이다.
의 야누코비치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중서부 지역의 격렬한 선거 불복 시위
로 인해 헌법재판소는 결선 재투표를 결정하였고, 재투표에서 친서방 성향
의 유센코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른바 ‘오렌지 혁명’은 미국 등 서방의 지원 혈통적으로 같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을 받았고, 유센코 대통령 부부는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경력이 있다.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의 공동 조상인 루시족(Русь)이 세운
유센코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 러시아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지는 않았으
키예프 공국은 13세기에 몽골에게 멸망되었고,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의
나, 이때부터 러시아와 서방 간에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당기기
중서부 지역은 몽골제국의 쇠락 이후 오랫동안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이는 국내정치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이웃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2014년에 대외 정책 노선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으로 야기된 극
17세기에 이 지역이 도움을 청해 오자 러시아는 그들을 폴란드의 압
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중서부 지역의 극우 반러시아 세력이, 친러 성
제로부터 해방시켰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존재하였던 기간은
향인 야누코비치 대통령 정부를 폭력으로 무너뜨리고 친서방 정부를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직후 몇 년간이 전부이고, 그 이전
수립하였다. 새로운 정부가 러시아어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등 강
에는 제정 러시아의 일부, 그 이후에는 소련의 일부였다. 그리고
경한 정책을 펴자, 러시아계가 다수인 동부 돈바스 지역이 분리 독
우크라이나 영토의 동남부, 크림반도, 서부 국경 지역은 소련
립하겠다고 반기를 들었는데,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를 무력으로
시절 행정구역의 변경을 통해 당시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에
진압하려 하면서 내전이 발발하였다.
속하게 된 것이다.
서방 언론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그간
러시아인들과 조상이 같은 만큼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
소위 ‘반란 지역’에 대해 2차 대전 중 나치독일이 저지른 만
인들과 언어, 종교 등이 거의 같은데 몽골의 지배 이후 수
행에 못지않은 ‘인종청소’를 자행하여 동부 지역 지방 정부
백 년 동안 역사적 경험을 달리하면서 정체성이 달라져,
들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초엽에 와서는 러시아인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이러한 상황에서 2014년과 2015년에 내전 종식을 위한 휴
분명하게 갖기 시작하였다.
전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주요 골자는 양측은 휴전하고 양
측 사이 완충지대를 설치하며, 동부 돈바스 지역에 대해 자
하지만 어쨌든 두 나라는 크게 보아 같은 민족이다. 젤렌
치를 허용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고 자치정부 수립을 위
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어 지역 출신이며, 대통령이 되기
한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였다는 사
실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친러시아 반군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직접 개입을 자제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외세의 개입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면이 있다.
118 2023년 12월•월간 대한사랑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