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5 - 대한사랑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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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왜곡
삼국시대 유물로 변해버린 가야유물 이병도는 모든 사료에 기록된 함창 고녕가야를 다른 가야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부
1990년대 4차선을 내면서 오봉산 고분군에서 철재 투구와 판갑 등 2000여점의 유물이 정하였다. 그러면서 진주의 고명인 거열과 소리가 비슷하므로 진주인 듯하다고 주장하였
출토되었다. 같은 형식의 투구가 고령과 함안에서 나왔는데, 그곳의 투구는 가야시대로 다. 하지만 거열은 진주가 아닌 거창의 옛 지명이었고, 진주지역에는 고녕가야가 존재했
분류해놓고, 오봉산 투구는 삼국시대로 분류했다. 오봉산에서 10km지점의 병풍산 고분 다는 어떤 고분군도 관련 사료가 전혀 없다.
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초기 철기유구가 발굴되었다. 상주 함창에는 3000여기 이상 이병도의 선언 이후 가야관련 학자들은 고녕 가야 왕릉과 왕비릉, 가야 고분군, 가야 철모
의 고분이 거의 도굴된 채 방치되고 있다. 지난해 도굴된 고분 5기를 발굴하면서 50여점 와 관련된 가야 유적이 발굴되는 데도 함창과 상주지역을 가야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최
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탄소연대측정도 없이 당국에서는 삼국시대 유물이라고 발표했다. 근 은퇴한 가야학계의 대표적인 두 학자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함창 고녕가야 존
재를 일관되게 부정하고 있다. 사료도 고고학적 발굴도 이들에겐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오직 부정을 위한 부정의 논리만 있는 것이다.
군인은 총칼을 잡고 국토를 지킨다면 사학자는 국사를 연구하여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이정표를 제시하는 직업군이다. 단순히 호구지책으로 사료와 유물유적을 해석하고 판단
하는 필부필녀의 언설일 수 없다. 함창 고녕가야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라고 수
십 번 공문과 언론을 통하여 이러한 뜻을 전달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고녕가야 역사가 뚜렷이 정립되는 날까지 나의 정진은 잠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봉산 투구 (위) 고분 내부 (위)
오봉산 고분 출토 가야철모와 마구 (아래) 상주의 파헤쳐진 고분(1천여기 파괴) (아래)
일제에 의해 삭제된 고녕가야
이렇게 사료와 유물유적이 즐비한데도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함창 고녕가야를
어거지로 삭제하고 진주 고녕가야를 만들어내었다. 물론 일인(日人) 식민사학자들은 뒤
에 앉아있고,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는 젊은 이병도와 신석호 등을 앞세웠다.
이병도의 스승인 ‘나가 미치오’는 함창 고녕가야는 가야산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가야라
고 하기에는 애매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이병도는 그들의 뜻을 알아채고 급한 김에
진주 고녕가야를 급조해 낸 것이다. 이유같지 않은 이유를 대면서 총독부를 배경삼아 허 함창읍 윤직리 머리메 조상돌(고인돌)을 향해 고천제를 올리고 있는 지정스님
세를 부리며 함창 고녕가야가 잘못된 듯하다고 어물쩍 총독부의 눈치를 살폈다.
102 2023년 12월•월간 대한사랑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