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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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었죠. 당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분은 대학생이었는데, 그분의 영향이 상
                     당히 있었죠.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식민사관과 비슷한 역사 얘기를 했지만, 역

                     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했던 환경이었던 거죠. 지금 되돌아보면 평양에 한
                     사군이 있었다는 얘기를 그때도 들었어요.



                     최원호 : 그렇군요. 그런데 당시는 법학과를 졸업하면 많은 분들이 법조계로 진

                     출하지 않았나요?
                     김주인 : 예. 대부분이 고시 아니면 은행원으로 많이 갔어요. 나도 한 2년 정도
                     고시 공부를 좀 했어요. 그런데 별로 적성에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우리 형제가 6

                     남매였다고 말했는데요. 내가 둘째예요. 형님이 나보다 7살이 많았는데, 아버지
                     가 사업에 실패하시고 생계가 어려울 때 61년도에 미국으로 가서 가발 사업을

                     해서 그곳에서 상당히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 난 만들고 형님한테 보내
                     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는 주문을 받아서 당시 유명한 YH무역
                     에 전달하는 식으로 사업을 했어요. 그러다가 이왕이면 내가 직접 생산해 보자

                     해서 1970년에 성남에 가발 공장을 시작한 거죠. 그게 지금 회사의 전신인 시즈
                     통상 주식회사였어요.



                     최원호 : 지금 회사 이름이 ㈜시즈글로벌로 알고 있는데, 당시 시즈통상이었으면

                     ‘시즈’라는 회사 이름을 지은 이유가 있겠네요?
                     김주인 : 예. 우리 형제들의 돌림자가 ‘때 시(時)’ 자예요. 내 이름도 족보에는 ‘시

                     항’으로 되어 있어요. 당시 내 바로 밑에 동생이 대학에 갈 형편이 안돼서 미국에
                     있는 큰 형님 밑에서 일하면서 4형제가 다 힘을 합해서 사업을 하게 됐죠. 처음
                     에 그렇게 시작을 해서 회사 이름도 ‘시즈’라고 하게 됐어요.



                     최원호 :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1973년에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사업가로서 마음

                     가짐이 달라지셨다고요.
                     김주인 : 예. 성남에 공장을 짓고 기숙사도 지으면서 잘해보려고 하는데 오일쇼

                     크가 터져서 막막하더라고요. 기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기숙사에 불을 땔 수
                     도 없었어요. 주문도 완전히 다 끊어지고. 당시 내 사무실이 2층에 있어서 공장

                     앞 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공원(工員)들이 옷 보따리만 싸서 하나둘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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