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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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해석이나 연구에 모순이 발생합니 강 중류인 평안도 평양부 지역이라면,
다. 두 지역을 구분해 적은 특별한 이유가
904년 궁예가 ‘마진(摩震)’을 개국하 없습니다. 두 지역을 구분했다는 것은
자, 각 지역 호족들이 궁예를 따르기 두 지역이 다른 지역일 가능성을 가집
(歸附) 시작합니다. 그중 ‘평양성주(平壤 니다.
城主)’라 불리는 장군 검용(黔用)도 있었 이러한 모순들은 『세종실록』 「지리
습니다.(『삼국사기』 권 제50 「열전」 권10 <궁 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平壤’ 지
예조>) 장군 검용의 근거지였던 ‘평양 명이 여러 곳에 있을 가능성과 재난·질
성’을 위 책들의 기록을 근거로, 평안 병·전쟁 등으로 주민이나 행정구역이
도 평양부 지역, 즉 대동강 중류 지역 이동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
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조선 시대 평
설치 전 서경은 황폐한 지역이었습니 안도 평양부가 대동강 중류에 있었다
다. 이러한 사실은 위 책들도 적고 있 고 해서, 같은 이름의 고구려 평양성도
습니다. 통일신라 말 호족이 성장할 정 대동강 중류에 있었고 거기에 설치된
도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지역이, 서경 고려 서경도 대동강 중류에 있었다고
이 설치된 921년 약 20년 사이에 황폐 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 지역으로 변할 가능성이 작고, 그
이유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사건도 밝
혀진 것도 없습니다. 주장2.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
1388년 고려 우왕은 명나라와 철령
위(鐵嶺衛) 설치 문제로 요동 정벌을 결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 지역이라
정하고, 요동 정벌군을 지휘하기 위해 는 주장은 『요사(遼史)』 「지리지」에 주
평양(平壤)으로 행차했습니다. 그리고 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반란죄로 처벌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몰수해 요동 정벌의 자금으로 본래 조선 땅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기
사용하고자 서경으로 운반하게 했습 자를 옥중에서 풀어 주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하였다. … 한나라 초
니다(『고려사』 권137 「열전」 제50 <우왕 14년
4월조>). 두 책의 기록대로 고려 우왕이 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
행차한 평양과 임견미와 염흥방에게 이 되었다. 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을 평정
몰수한 자금을 보낸 서경이 같은 대동 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 4군으로 삼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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