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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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평양성 위치를 정할 수 있고, 고려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 장수를 보내
서북 경계를 대략적이나마 추정해 볼 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을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 국내성(國內城)으로
부터 옮겨와 도읍했다. 보장왕 27년 당
주장1. 평안남도 대동강 중류 (唐) 고종(高宗)이 이적을 보내 신라와 함
께 협공(夾攻)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
고려 서경의 위치에 관해, ‘평안남도 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고, 좌위위대장
대동강(大同江) 중류 지역(현재 평안남도 평 군 설인귀(薛仁貴)에게 군사 2만을 거느
양시)’이라는 주장과 ‘중국 요령성 태자 리고 진무하게 했다. 뒤에 당 군사가 떠
하(太子河) 중류 지역(현재 요령성 요양시)’이 나자 그 땅이 모두 신라로 들어갔다. 고
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려 태조 원년 평양이 황폐하였기 때문에
평안남도 대동강 중류 지역 주장은 염주(鹽州)·백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 州)·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을 옮
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주된 근거를 겨서 인구를 채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두고 있습니다. 삼았고, 조금 뒤에 서경(西京)으로 삼았
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안도 평양부
본래 삼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조>)
당요 무진년 신인(神人)이 태백산 박달나
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종실록』 「지리지」는 1454년, 『신
세워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해서 단 증동국여지승람』은 1462년에 편찬된
군(檀君)이라 일컬었다. 이것이 전(前) 조 조선 초기의 지리지로, 그 내용에 큰
선이고, 주 무왕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 차이는 없습니다. 두 책은 고조선 왕
(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後) 조 험성,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
선이다. 41대손 준(準)에 이르러, 연(燕) 고려 서경이 모두 조선 시대 평안도 평
사람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고 왕험 양부(平壤府) 지역에 있었다고 적고 있
성(王險城)에 도읍했다. 험(險)은 검(儉)이 습니다. 평안도 평양부는 현재 대동강
라고도 쓰는데, 바로 평양(平壤)이다. 이 중류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사에 등장하는 모든 평양 관련 지역을
한(漢)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모두 평안도 평양부로 본다면 역사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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