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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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족속들 다.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일대에도 스
과의 교역에 개방적이었다. 스키타이 키타이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물론 이
는 우월한 군사력으로 주변 족속들을 들은 앞에서 말한 우크라이나 지역의
보호해주는 대가로 공납을 받기도 하 스키타이 국가에는 속하지 않았다.
였는데, 이것도 스키타이 부의 원천 가 이들 아시아의 스키타이인 사카족
운데 하나였다. 들은 카스피 해 동쪽, 오늘날의 중앙
스키타이는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먼저 큰 나라를 세운 사람들로 일컬 으로부터 남부 시베리아, 파미르 고원,
어진다. 흑해 북안 즉 오늘날의 우크 알타이 지역에까지 널리 분포되어 살
라이나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헤로도 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발견된
토스는 당시 스키타이 국가의 영토가 알타이 지역 파지리크 고분은 사카족
동서 4,000 스타디온, 남북의 길이도 의 고분으로 여겨지는데, 스키타이 양
4,000 스타디온이라고 하였다. ‘스타 식의 금속조형물들과 말을 탄 사카족
디온’은 경기장의 길이로서 대략 180 기사의 모습을 담은 모전 직물도 생생
미터 정도인데 그렇다면 당시 스키타 한 모습으로 발굴되어 사람들을 놀라
이 나라의 크기는 오늘날의 우크라이 게 하였다. 파지리크 고분의 부장품으
나 영토와 비슷한 52만 평방 킬로미터 로 판단하건대, 알타이 지역까지 스키
정도가 된다. 타이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는
아시아 초원의 사카족 1969년 알마티 근처의 이시크 고분을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인들 발굴하였는데, 황금 갑옷을 입은 유해
은 스키타이인들을 ‘사카’라고 불렀다. 가 나왔다. 이 고분에서 나온 황금 장
사카족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 식품만 4천 점이 넘었다. BCE 5세기경
아를 위해 그리스인들과 싸운 많은 페 의 사카족 수장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
르시아 동맹 가운데 가장 용감하게 싸 을 카자흐스탄 정부에서는 ‘황금인간
운 족속이었다고 한다. 그는 페르시아 (알틴 아담)’이라 부르고 수도 아스타나
전쟁에 참여한 사카족을 ‘아뮈르기온’ 를 비롯한 주요 박물관에 국가의 대표
출신 스키타이족이라 하였는데, 아뮈 유물로 전시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인
르기온은 옥수스 강(오늘날의 아무다리야 들은 이를 통하여 기마유목민인 사카
강) 동쪽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보인 족 후예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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