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뉴스
침략(식민)사관 재 등장의 역사적 구조
[‘일제하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건설론’ 연구프로젝트 발족기념 국회세미나]
“침략(식민)사관 재 등장의 역사적 구조”- 식민사관은 일제 침략자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것
박찬남 기자ㅣ입력 2013/08/30
[마로니에방송 박찬남] 한일간 독도문제와 중일간 조어도문제 등 동아시아 영토분쟁이 격화되고 있으며, 일본 군국주의 사관을 옹호하는 세력이 일본정계의 주역으로 재등장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을 앞세워 고대역사에 대한 역사적 침탈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종걸의원실과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근현대 총서사업” 취지와 동아시아 분쟁의 역사적 진실에 입각한 해법 모색을 위한 <침략(식민)사관 재등장의 역사적 구조> 주제의 세미나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개최하였습니다.(후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 우당 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의암 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여천 홍범도선생기념사업회, 국학연구소)
내빈소개 및 개회사 : 이종걸 국회의원
축 사 : 신학용 국회의원 (국회 교육문화관광체육위원장)
대일항쟁기는 일제에게 빼앗긴 강역을 되찾기 위한 투쟁의 시기이자 역사 해석권을 두고 싸웠던 역사전쟁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희산 김승학 선생 등이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분들이 시종 무장항일투쟁을 주장했던 사실도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전쟁과 무장항일투쟁은 독립전쟁의 두 축이었습니다.
기조발제 : “한국학진흥과 한국근현대사 연구”
정윤제 (한국중앙연구원 교수, 한국학진흥사업단장)
기조발제 : “침략사관 재등장의 역사적 구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고 3·1운동 이후에는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관을 조직적으로 만들고 전파했습니다. 식민사관은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 다양한 논리로 구성되었지만 그 핵심 이론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됩니다.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로 가두어 놓았습니다.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허위로 몰아서 반만년 한국사를 1천 5백여 년의 짧은 역사로 축소시켰습니다. 한반도 북부는 한사군이란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강변함으로써 독립의 의지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제1주제 : “동북아 고대 영토관과 그 실제”
김동환 국학연구소
제2주제 : “지리지로 살펴보는 한·중·일 고대강역”
김병기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 참의부 참의장 김승학 손자
제3주제 : “유럽 사학이론으로 비춰보는 식민사관”
박양식 한신대 연구교수
식민사관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종결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요청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체제가 들어서면서 무산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사편수회에서 복무했던 일부 한국인 학자들이 해방 후에도 역사학문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무산되었습니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식민사관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식민사관은 한국사의 정설(定說)로 자리 잡았고, 심지어 교과서도 그렇게 쓰여졌습니다. 그 결과 현재 한국 사회 전반에서 식민사학에 대한 광범한 비판과 반발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종입력 : 2013.08.31 l 편집 : @ 마로니에방송